미래에는 종이 없이 살 거라는 예상은 정말 타당해 보인다. 벌써 20년전부터 디지털 업체들은 종이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산물인지를 계시라도 하듯 합창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인쇄와 제지업체들도 딱 그만큼 모여서 반론을 펼치며 이렇게 외쳤다. "사무실에 더 많은 컴퓨터를 설치하라! 그럴수록 더 많이 출력하라!"
어째서 일상에는 아직도 종이가 수백만 톤씩 끼여 있을까? 게다가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에 내뿜는데 말이다. 어째서 단 한 곳의 사무실도 빽빽이 들어찬 종이 더미를 완전히 없애지 못할까? 사무실 곳곳에 고화질 고성능 모니터들이 나날이 늘어났는데도 말이다.
종이는 우선 자료 보관에 탁월하다. 종이는 긁히지 않으면서도 건전지도 필요 없고 다운도 안 된다. 그러다 그냥 버리면 끝이다. 전 세계 18개 언어로 작성된 사용 설명서도 필요 없다. 종이는 재활용도 쉽다. 종이는 전혀 복잡하지도 않다. 들고 다니기만 좀 힘들 뿐이다.
빠르게 이런 생활을 버리지 않았느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선진 실험실에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스크린 작업을 착수했다. 10년 후쯤 모두가 개인용 '소프트 스크린'을 들고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해 보자. 전자책은 여행 중이라면 그보다 더 편할 수 없다. 일상에서는 물론이고 비좁은 비행기 안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맞는 말이다. 언젠가는 이런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많아질 것이다. 책에는 냄새가 있다. 인쇄된 글자를 우리는 섬세한 손 끝으로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책들은 현재보다 더욱 고급스럽고 귀하며 소중하게 취급될 것이다. 그리고 틀림 없이 냄새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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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책은 단순한 일개 매체가 아니다. 촉각, 청각, 시각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감각 체계와 연결된 문화 상품이다. 책은 생각을 대변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책의 물리적인 차원은 버릴 수 없는 필수 요소다.
이메일을 출력하는 현상은 사무실마다 발생하는데 이 현상을 우리는 인류학과 관련된 문자 하나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인류는 뭔가 부스럭거려야만 진지하게 반응한다." 인간의 뇌는 수백만년에 걸쳐 손으로 만지고 쥐는 행위를 통해 발전해 왔다. 현대 교육학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학습이 좋은 학습이다. 가장 생산적인 학습 상황은 연극이며 가장 훌륭한 방식은 폭발, 연기, 악취가 있는 실험 방식이다." 정보는 물리학이다. 우리는 뭐든 손에 쥐고 싶어하는 존재인 까닭에 이메일을 출력한다. 디지털 시대에서 종이란 선택의 표시다. 선택할 만한 중요한 것은 종이에 출력한다,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는 디지털 저승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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